독일 보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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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보수당은 1876년 창당된 정당으로, 프로이센 보수당을 기반으로 독일 제국 내 보수 세력을 결집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융커 계급과 프로이센 연합 복음주의 교회를 대변하며 군주제, 보호 무역, 반(反)자유주의, 반(反)사회주의를 주장했다. 1892년 티볼리 강령을 통해 반유대주의를 공식화하며, 농업자 동맹을 결성하여 지지 기반을 확대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해산되었으며, 주요 지지자들은 독일 국가인민당으로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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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보수당 - [정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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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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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독일 보수당 |
본부 | 베를린, 독일 |
창립 | 1876년 6월 7일 |
해산 | 1918년 11월 9일 (사실상), 1933년 (법률상) |
합병 대상 | 독일 국가인민당 |
이념 및 정치적 위치 | |
정치적 위치 | 우익 |
이념 | 보수주의 (독일) 프로이센 민족주의 군주주의 국가주의 반자유주의 보호무역주의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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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창당 배경 및 초기 역사
독일 보수당은 1848년 혁명의 여파 속에서 프로이센 왕국의 보수 세력이 결집하여 창당된 프로이센 보수당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들은 주로 엘베 강 동쪽의 대지주 귀족인 융커의 이익을 대변했다.[3] 프로이센 보수당은 프로이센 의회에서 정치적 기반을 가졌으며, 삼계급 선거법으로 인해 농촌 엘리트와 부유층에게 유리한 대표성을 확보했다.
독일 제국 성립 이후, 프로이센 보수당 내에서 비스마르크와 "독일"에 대한 부정적 태도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873년 대불황 이후 보호 무역주의 여론이 높아지면서,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에서 보수주의로 노선을 변경했다. 1876년 7월, 비스마르크의 지원 하에 독일 보수당(DKP)이 창당되었다. 독일 보수당은 프로이센 보수당뿐만 아니라 독일 제국 내 보수 세력을 결집하는 형태로 창설되었다.[3]
독일 보수당은 독일 귀족, 융커 토지 소유주, 엘베 강 동쪽에 거주하는 사람들, 프로이센 연합 복음주의 교회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프로이센 의회에서 정치적 거점을 가지고 있었다. 삼계급 선거법은 농촌 엘리트와 부유층에게 불균형적인 대표성을 부여했다. 주로 프로이센 전통적 보수주의자였던 당원들은 1871년 독일 통일에 처음에는 회의적이었다.
2. 1. 프로이센 보수당
독일 보수당의 전신인 프로이센 보수당은 1848년 혁명의 여파 속에서 프로이센 왕국의 보수 세력이 결집하여 창당되었다. 이들은 주로 엘베 강 동쪽의 대지주 귀족인 융커의 이익을 대변했다.[3] 프로이센 보수당은 프로이센 의회에서 정치적 기반을 가졌으며, 삼계급 선거법으로 인해 농촌 엘리트와 부유층에게 유리한 대표성을 확보했다.2. 2. 독일 보수당의 창당
독일 제국 성립 이후, 프로이센 보수당 내에서는 비스마르크와 "독일"에 대한 부정적 태도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873년 대불황 이후 보호 무역주의 여론이 높아지면서,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에서 보수주의로 노선을 변경했다. 1876년 7월, 비스마르크의 지원 하에 독일 보수당(DKP)이 창당되었다. 독일 보수당은 프로이센 보수당뿐만 아니라 독일 제국 내 보수 세력을 결집하는 형태로 창설되었다.[3]독일 보수당은 독일 귀족, 융커 토지 소유주, 엘베 강 동쪽에 거주하는 사람들, 그리고 프로이센 연합 복음주의 교회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프로이센 의회에서 정치적 거점을 가지고 있었다. 삼계급 선거법은 농촌 엘리트와 부유층에게 불균형적인 대표성을 부여했다. 주로 프로이센 전통적 보수주의자였던 당원들은 1871년 독일 통일에 처음에는 회의적이었다.
3. 주요 정책 및 이념
독일 보수당은 독일 귀족, 융커 토지 소유주, 엘베 강 동쪽에 거주하는 사람들, 그리고 프로이센 연합 복음주의 교회의 이익을 대변했다. 이들은 프로이센 란트타크에 정치적 거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삼계급 선거법 덕분에 농촌 엘리트와 부유층은 불균형적인 대표성을 누렸다.
주로 프로이센 전통적 보수주의자였던 당원들은 1871년 독일 통일에 처음에는 회의적이었다. 이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 수상의 정책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사업 거물들이 주도한 자유 보수당과는 다른 점이었다.
독일 보수당의 주요 정책 및 이념은 다음과 같다.
- 군주제 수호와 반(反)민주주의: 군주제를 옹호하고, 경제적 자유주의와 민주화에 반대했다.
- 보호 무역주의: 장기 불황 동안 러시아 제국과 미국으로부터의 곡물 수입을 제한했다.
- 반(反)유대주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유대인 영향"을 비난했다.
개신교가 주류였지만, 독일 보수당은 ''문화 투쟁''에는 반대했다. 레오 폰 카프리비의 새로운 노선에 강력히 반대했으며, 1909년 베른하르트 폰 뷜로 재상의 상속세 개혁 시도에 신임을 철회하여 뷜로가 사임하게 만들었다.[3]
빌헬름 2세의 해군 정책과 영독 해군 군비 경쟁을 지지했지만, 초기에는 독일 식민 제국과 범게르만 연맹 활동가들과 거리를 두었다.
1918년 11월 군주제 붕괴와 독일 혁명 이후 해산되었고, 대부분의 지지자들은 새로 설립된 독일 국가 인민당으로 합류했다.
3. 1. 군주제 수호와 반(反)민주주의
헬무트 폰 몰트케 원수나 엘라르트 폰 올덴부르크-야누샤우와 같은 구(舊) 보수주의자들은 군주제의 권력을 지지하고, 경제적 자유주의 및 민주화에 반대했으며, 프로이센의 선거 개혁이나 독일 전체의 진정한 의회 정부 수립에 반대했다.[3]독일 보수당은 삼계급 선거법을 옹호하며 보통 선거권 도입에 반대했다. 보통 선거권으로 인해 연방 차원에서 독일 보수당은 그 중요성이 현저히 감소했다. 1878년 연방 선거에서 13.0%의 득표율로 국회에 59명의 의원을 진출시켰으나, 이후 독일인들이 농촌 지역에서 서부 산업 중심지로 이동(''오스트플루흐트'')하면서 지지세가 약화되었다. 이에 당은 아돌프 슈퇴커가 이끄는 기독교 사회당과 선거 동맹을 맺고, 기회주의적으로 반유대주의를 포용했다.
3. 2. 보호 무역주의
장기 불황 동안 독일 보수당은 러시아 제국과 미국으로부터의 곡물 수입을 제한하는 보호 무역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을 때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지지했다.[3] 이는 농업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융커 계급의 이익을 우선시한 정책이었다.3. 3. 반(反)유대주의
토마스 칠더스는 보수주의자들이 반유대주의를 플랫폼에 통합한 독일 최초의 주요 정당이라고 평가했다.[3] 1892년 당 강령은 "사기를 떨어뜨리는 유대인 영향"을 비난했지만, 이러한 태도가 여론 조사에서 당의 몰락을 막지 못하자 이 요소는 축소되었다. 독일 보수당은 아돌프 슈퇴커가 이끄는 기독교 사회당과 선거 동맹을 맺고 기회주의적으로 반유대주의를 포용했지만, 슈퇴커는 1896년에 동맹을 철회했다.4. 주요 활동 및 정치적 영향력
독일 보수당은 주로 프로이센의 전통적 보수주의자들로 구성되었으며, 1871년 독일 통일에 초기에는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4] 헬무트 폰 몰트케 원수와 같은 구 보수주의자들은 군주제의 권력을 지지하고, 경제적 자유주의와 민주화에 반대했으며, 프로이센의 선거 개혁이나 독일 전체의 진정한 의회 정부 수립에 반대했다.
보통 선거권 도입으로 연방 차원에서 독일 보수당의 중요성은 감소했다. 1878년 연방 선거에서 13.0%의 득표율로 국회에 59명의 의원을 진출시켰으나, 이후 독일인들이 농촌 지역에서 서부의 새로운 산업 중심지로 이동하면서 지지 기반을 잃었다(''오스트플루흐트''). 이에 아돌프 슈퇴커가 이끄는 기독교 사회당과 선거 동맹을 맺고 반유대주의를 수용하기도 했다. 토마스 칠더스는 보수주의자들이 반유대주의를 정강에 통합한 독일 최초의 주요 정당이라고 평가했다. 1892년 당 강령은 "사기를 떨어뜨리는 유대인 영향"을 비난했지만, 이러한 태도가 여론 조사에서 당의 몰락을 막지 못하자 이 요소는 축소되었다. 슈퇴커는 1896년에 동맹을 철회했다.
독일 보수당은 개신교 중심이었지만 ''문화 투쟁''에는 반대했다. 그러나 장기 불황 동안 러시아 제국과 미국으로부터의 곡물 수입을 제한하는 보호 무역 정책을 시행했을 때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지지했다. 1879년부터 1880년에 걸쳐 국민자유당이 비스마르크 지지파와 반대파로 분열되면서, 독일 보수당은 독일 제국당, 국민자유당과 함께 비스마르크의 여당적 세력을 구성하게 되었다. 제국 의회 의원 선거는 소선거구제에서 과반수를 획득한 후보가 없을 때는 상위 2명에 의한 결선 투표가 실시되는 제도였기 때문에, 결선 투표에 대비하여 선거 협력이 필요했다. 비스마르크는 1887년에 보수당, 제국당, 국민자유당과 선거 협정을 맺었다.
1890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 실각 이후, 빌헬름 2세의 친정 시대가 시작되면서, 레오 폰 카프리비 재상의 자유 무역 정책에 반대했다.[4] 1891년부터 1892년에 걸쳐 각국과의 통상 조약이 체결되고 농업 관세가 인하되자 융커와 지주들의 이익이 침해되었기 때문이다. 1893년 2월 18일 농업자 동맹을 결성하여 중소 농민으로 지지 기반을 확대하고, 반유대주의 선동을 강화했다.[5] 이들은 대지주와 중소 농민의 복잡한 이익을 "농업 이익"이라고 칭하며, 그 옹호자임을 선전함으로써 중소 농민을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중간 계층에게도 지지를 넓히기 위해 전투적인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를 채택했다. 그 결과 1900년까지 23만 명의 동맹원을 확보하며, 친정 시대 최대의 대중 조직으로 성장했다.
1892년 베를린의 티볼리 홀에서 개최한 당대회에서 티볼리 강령(Tivoli-Programm)을 제정했다.[4] 그 안에서 곡물 가격 유지와 농민, 수공업자 등 중간 계층의 이익 옹호를 강조했다. 또한, 이전까지의 반자유주의, 반사회주의 입장에 더해, 반유대주의 입장도 명확하게 드러냈다. 이는 산업화의 물결로 경제적 곤궁이 심화되던 농촌에서 고조되는 반유대주의 감정에 호응한 것이었다.
베른하르트 폰 뷜로 재상 시기에는 자유주의 세력과 '뷜로 블록'을 형성했지만,[3] 재정 개혁안을 둘러싸고 결렬되었다.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 재상 시기에는 중앙당과 함께 '흑청 블록'을 형성하여 정부를 지지했다. 프로이센 의회에서는 삼계급 선거제도 덕분에 제1당의 지위를 유지하며, 프로이센 정부와 관료 기구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6]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보수당을 비롯한 우파 정당들은 "승리의 평화"를 주장했다. 이는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점령지를 병합함으로써 평화를 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사민당은 영토 병합에 반대하며, 적국 국민과의 화해를 통해 평화를 이루는 "화해의 평화"를 주장했다.[7] 독일 혁명 이후 1918년 12월 4일, 독일 보수당은 해산되고, 대부분의 지지자들은 독일 국가인민당(DNVP)으로 흡수되었다.[7]
선거일 | 득표 | 득표율 | 득표 순위 | 획득 의석 (총 의석) | 의석 순위 |
---|---|---|---|---|---|
1877년 1월 10일 | 526,000표 | 9.7% | 제3당 | 40석 (397석) | 제3당 |
1878년 7월 30일 | 749,500표 | 13.0% | 제4당 | 59석 (397석) | 제3당 |
1881년 10월 27일 | 830,800표 | 16.3% | 제2당 | 50석 (397석) | 제3당 |
1884년 10월 28일 | 861,100표 | 15.2% | 제4당 | 78석 (397석) | 제2당 |
1887년 2월 21일 | 1,147,200표 | 15.2% | 제3당 | 80석 (397석) | 제3당 |
1890년 2월 20일 | 895,100표 | 12.4% | 제5당 | 73석 (397석) | 제2당 |
1893년 6월 15일 | 1,038,300표 | 13.5% | 제3당 | 72석 (397석) | 제2당 |
1898년 6월 16일 | 859,200표 | 11.1% | 제4당 | 56석 (397석) | 제2당 |
1903년 6월 16일 | 948,500표 | 10.0% | 제4당 | 54석 (397석) | 제3당 |
1907년 1월 25일 | 1,060,200표 | 9.4% | 제4당 | 60석 (397석) | 제2당 |
1912년 1월 12일 | 1,126,300표 | 9.2% | 제5당 | 43석 (397석) | 제4당 |
4. 1. 비스마르크 시대
독일 보수당은 독일 귀족, 융커 토지 소유주, 엘베 강 동쪽에 거주하는 사람들, 그리고 프로이센 연합 복음주의 교회의 이익을 대변했다. 프로이센 란트타크에서 정치적 기반을 가졌으며, 삼계급 선거법으로 인해 농촌 엘리트와 부유층에게 유리했다.주로 프로이센 전통적 보수주의자였던 당원들은 1871년 독일 통일에 처음에는 회의적이었다. 헬무트 폰 몰트케 원수와 같은 구 보수주의자들은 군주제의 권력 지지, 경제적 자유주의 및 민주화 반대, 프로이센의 선거 개혁 또는 독일 전체의 진정한 의회 정부에 대한 반대 입장을 보였다.
보통 선거권으로 인해 연방 차원에서 독일 보수당의 중요성은 감소했다. 1878년 연방 선거에서 13.0%의 득표율로 국회에 59명의 의원을 진출시켰다. 이후 독일인들이 농촌 지역에서 서부의 새로운 산업 중심지로 이동하면서 표를 잃었고(''오스트플루흐트''), 아돌프 슈퇴커가 이끄는 기독교 사회당과 선거 동맹을 맺고 반유대주의를 수용했다.
토마스 칠더스는 보수주의자들이 반유대주의를 정강에 통합한 독일 최초의 주요 정당이라고 말했다. 1892년 당 강령은 "사기를 떨어뜨리는 유대인 영향"을 비난했지만, 이러한 태도가 여론 조사에서 당의 몰락을 막지 못하자 이 요소는 축소되었다. 슈퇴커는 1896년에 동맹을 철회했다.
주로 개신교였지만 독일 보수당은 ''문화 투쟁''에 반대했지만, 장기 불황 동안 러시아 제국과 미국으로부터의 곡물 수입을 제한하여 보호 무역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을 때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지지했다.
1879년부터 1880년에 걸쳐 국민자유당은 비스마르크 지지의 보호 무역파와 비스마르크 반대파인 자유 무역파로 분열되었고, 후자는 당을 떠났다. 이후 독일 보수당과 독일 제국당(프로이센에서의 당명은 자유보수당)과 국민자유당은 비스마르크의 여당적 세력을 구성하게 되었다.
제국 의회 의원 선거는 소선거구제에서 과반수를 획득한 후보가 없을 때는 상위 2명에 의한 결선 투표가 실시되는 선거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결선 투표에 대비하여 선거 협력이 필요했다. 비스마르크는 1887년에 보수당, 제국당, 국민자유당에 "3당 중 이전 선거에서 승리한 정당이 있는 선거구는 그 당의 후보자를 나머지 두 당이 지원하고, 그 외의 선거구에서는 단일 후보를 옹립한다"는 협정을 맺게 했다. 그 때문에 이 3당은 "카르텔"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선거일 | 득표 | 득표율 | 득표 순위 | 획득 의석 (총 의석) | 의석 순위 |
---|---|---|---|---|---|
1877년 1월 10일 | 526,000표 | 9.7% | 제3당 | 40석 (397석) | 제3당 |
1878년 7월 30일 | 749,500표 | 13.0% | 제4당 | 59석 (397석) | 제3당 |
1881년 10월 27일 | 830,800표 | 16.3% | 제2당 | 50석 (397석) | 제3당 |
1884년 10월 28일 | 861,100표 | 15.2% | 제4당 | 78석 (397석) | 제2당 |
1887년 2월 21일 | 1,147,200표 | 15.2% | 제3당 | 80석 (397석) | 제3당 |
1890년 2월 20일 | 895,100표 | 12.4% | 제5당 | 73석 (397석) | 제2당 |
1893년 6월 15일 | 1,038,300표 | 13.5% | 제3당 | 72석 (397석) | 제2당 |
1898년 6월 16일 | 859,200표 | 11.1% | 제4당 | 56석 (397석) | 제2당 |
1903년 6월 16일 | 948,500표 | 10.0% | 제4당 | 54석 (397석) | 제3당 |
1907년 1월 25일 | 1,060,200표 | 9.4% | 제4당 | 60석 (397석) | 제2당 |
1912년 1월 12일 | 1,126,300표 | 9.2% | 제5당 | 43석 (397석) | 제4당 |
4. 2. 빌헬름 2세 시대
1890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 실각 이후, 빌헬름 2세의 친정 시대가 시작되면서, 레오 폰 카프리비 재상의 자유 무역 정책에 반대했다.[4] 1891년부터 1892년에 걸쳐 각국과의 통상 조약이 체결되고 농업 관세가 인하되자 융커와 지주들의 이익이 침해되었기 때문이다.1893년 2월 18일 농업자 동맹을 결성하여 중소 농민으로 지지 기반을 확대하고, 반유대주의 선동을 강화했다.[5] 이들은 대지주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면서, 대지주와 중소 농민의 복잡한 이익을 "농업 이익"이라고 칭하며, 그 옹호자임을 선전함으로써 중소 농민을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중간 계층에게도 지지를 넓히기 위해 전투적인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를 채택했다. 그 결과 1900년까지 23만 명의 동맹원을 확보하며, 친정 시대 최대의 대중 조직으로 성장했다.
1892년 베를린의 티볼리 홀에서 개최한 당대회에서 티볼리 강령(Tivoli-Programm)을 제정했다.[4] 그 안에서 곡물 가격 유지와 농민, 수공업자 등 중간 계층의 이익 옹호를 강조했다. 또한, 이전까지의 반자유주의, 반사회주의 입장에 더해, 반유대주의 입장도 명확하게 드러냈다. 이는 산업화의 물결로 경제적 곤궁이 심화되던 농촌에서 고조되는 반유대주의 감정에 호응한 것이었다.
베른하르트 폰 뷜로 재상 시기에는 자유주의 세력과 '뷜로 블록'을 형성했지만,[3] 재정 개혁안을 둘러싸고 결렬되었다.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 재상 시기에는 중앙당과 함께 '흑청 블록'을 형성하여 정부를 지지했다.
프로이센 의회에서는 삼계급 선거제도 덕분에 제1당의 지위를 유지하며, 프로이센 정부와 관료 기구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6]
4. 3. 제1차 세계 대전과 해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보수당을 비롯한 우파 정당들은 "승리의 평화"를 주장했다. 이는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점령지를 병합함으로써 평화를 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사민당은 영토 병합에 반대하며, 적국 국민과의 화해를 통해 평화를 이루는 "화해의 평화"를 주장했다.[7]독일 혁명 이후 1918년 12월 4일, 독일 보수당은 해산되고, 대부분의 지지자들은 독일 국가인민당(DNVP)으로 흡수되었다.[7]
5. 역대 당수
이름 | 재임 기간 |
---|---|
오토 폰 헬도르프 | 1876년-1892년 |
프리드리히 추 림부르크-슈티룸 | 1892년-1895년 |
오토 폰 만토이펠 | 1895년-1911년 |
에른스트 폰 하이데브란트 운트 데어 라사 | 1914년-1918년 |
6. 평가 및 유산
독일 보수당은 독일 제국 시기 독일 귀족, 융커 토지 소유주, 엘베 강 동쪽에 거주하는 사람들, 그리고 프로이센 연합 복음주의 교회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졌다.[3] 이들은 프로이센 란트타크에서 정치적 거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삼계급 선거법으로 인해 농촌 엘리트와 부유층에게 불균형적인 대표성을 부여받았다.[3]
헬무트 폰 몰트케 원수나 엘라르트 폰 올덴부르크-야누샤우와 같은 구 보수주의자들의 정책은 일반적으로 군주제의 권력 지지, 경제적 자유주의 및 민주화 반대, 프로이센의 선거 개혁 또는 독일 전체의 진정한 의회 정부에 대한 반대를 포함했다.
보통 선거권으로 인해, 연방 차원에서 독일 보수당(DKP)은 현저히 감소된 중요성에 직면해야 했다. 1878년 연방 선거에서 투표의 13.0%를 얻었고, 국회에 59명의 의원으로 진출했다. 그 후, 독일인들이 농촌 지역에서 서부의 새로운 산업 중심지로 이동하면서 표를 잃은 (''오스트플루흐트'') 당은 아돌프 슈퇴커가 이끄는 기독교 사회당과 선거 동맹을 맺었고, 기회주의적으로 반유대주의를 포용했다.
토마스 칠더스는 보수주의자들이 반유대주의를 플랫폼에 통합한 독일 최초의 주요 정당이라고 말했다. 1892년 당 강령은 "사기를 떨어뜨리는 유대인 영향"을 비난했지만, 이러한 태도가 여론 조사에서 당의 몰락을 막지 못하자 이 요소는 축소되었다.
주로 개신교였지만 독일 보수당(DKP)은 ''문화 투쟁''에 반대했지만, 장기 불황 동안 러시아 제국과 미국으로부터의 곡물 수입을 제한하여 보호 무역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을 때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지지했다. 이어서 DKP는 그의 후임자 레오 폰 카프리비의 새로운 노선에 강력히 반대했다. 또한 1909년 상속세 개혁을 시행하려 하자 베른하르트 폰 뷜로 재상에 대한 신임을 철회했다. 뷜로는 개혁 실패 후 사임했다.[3]
이러한 독일 보수당의 행보는 융커 계급의 이익만을 대변하고, 반유대주의를 선동하여 독일 사회 통합을 저해하고 소수자를 억압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현대 한국의 관점에서 볼 때, 독일 보수당의 정책과 이념은 시대착오적이며,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에 반하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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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The Agrarian-Industrial Front in Bismarckian Politics, 1873—1879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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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Conservative Politics and aristocratic landholders in Bismarckian Germany.
https://www.jstor.or[...]
1972
[3]
웹사이트
Bülow, Bernhard Heinrich Martin Graf (seit 1899) Fürst (seit 1905) von
https://www.deutsche[...]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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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many: The Long Road West, 1789–1933
Ox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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